처음에는 감추어진 마지막 카운트 다운

우리는 인류가 처음 창조된 상태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보았습니다. 성경은 역사가 시작됐을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근거한 그의 계획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 진정한 도서관

첫째, 성경에 관한 몇가지 사실. 성경은 많은 저자들이 쓴 책의 모음입니다. 이 책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쓰여지는데 150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다른 위대한 책들과는 차별화하고 서재와 비슷하게 만듭니다. 만약 성경이 단 한명의 저자, 혹은 서로를 아는 그룹에 의해 쓰여졌다면 우리는 그 단일성에 놀라지 않을지도 있지만, 성경의 저자는 수백년에서 수천년 까지도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 저자들은 각각 다른 나라, 언어 및 사회적 위치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세지와 예언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이는 성경밖 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구약 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예수님 이전의 책들)은 기원전 200년 경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신약 성서의 사본은 서기 125년 이후에 작성되었습니다.

가든의 복음 약속

우리는 성경의 맨 처음에 성경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예언하는지 예시를 볼수 있습니다. 그것이 시작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은 마음에 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타락을 가져온 직후 하느님이 사탄과 수수께끼에 직면했을때 하신 약속을 볼수 있습니다.

인류의 타락

“… 그리고 나 (하느님) 는 너 (사탄)와 여인, 그리고 너희 자손들 사이에 적대감을 생성시킬 것이다. 그는 너의 머리를 부실것이고, 너는 그의 발 뒤꿈치를 칠 것이다.”(창세기 3:15)

당신은 이것이 미래의 시제가 될것이라는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외에도 다섯개의 다른 특성이 있다.

 

  1. 나 = 하나님
  2. 너 = 뱀 혹은 사탄
  3. 여자
  4. 여자의 자손
  5. 뱀, 혹은 사탄의 자손

그 약속은 미래에 이러한 인물들이 어떻게 연관될지 예측합니다. 이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약속안 인물간의 관계

이것은 ‘여자’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여자 모두에게 ‘자손’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이 자손들과 여자, 그리고 사탄 사이에는 ‘적대감’ 혹은 증오가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여자의 자손이 ‘머리를 부술’때 ‘발 뒤꿈치를 칠것’ 이다.

 

자손은 누구입니까?- ‘

우리는 몇가지 관찰을 하였고, 몇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자의 ‘자손’이 ‘그’이기 때문에 우리는 몇가지 가능성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손은 ‘그녀’가 아니며 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손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나 국가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 자손은 사람이지, ‘그것’이 아닙니다. 자손은 철학, 교육, 정치적 시스템 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항상 새로운 제도와 종교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같은것은 부패 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선호하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한 남자 인간. 이 ‘그’는 사탄의 머리를 부술것 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세요. 하나님은 이 자손이 여자와 남자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난다고 합니다. 성경은 거의 항상 아버지를 통해 오는 아들만 기록하기 때문에 이는 특히 드문경우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아버지의 아들만을 기록하기에 ‘성 차별주의자’로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점이 있습니다- 남자에게서 오는 자손 (‘그’)에 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남자를 언급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자손이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참뒤 예언자가 그 약속을 쌓습니다.

수백년 후, 구약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직접 너희에게 표적을 주실 것이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a]‘임마누엘’ 이라 부를 것이다. (이사야7:14)

이사야 후 7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신약 전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아주 일찍이 예견하고 있으셨습니다-인간의 역사의 시작되는 그때부터. 이것은 ‘그녀’, ‘그들’ 혹은 ‘그것’이 아닌 ‘그’로서 자손들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수수께끼를 읽는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뒤꿈치를 치다‘??

그러나 사탄이 ‘그의 뒤꿈치’를 치는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년전 나는 카메룬의 정글에서 일했습니다. 습기가 많고 더운날에 우리는 두꺼운 고무장화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긴 풀밭에 누워서 당신의 발 뒤꿈치를 치고 당신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글을 경험한 후 그것은 나에게 이해가 되었다. ‘그’는 뱀-사탄-을 멸망시킬 것이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죽을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얻은 승리를 예시합니다.

‘여자’- 이중적 의미

그래서 처음에 이 약속이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여자는 그를 낳은 처녀 여자-마리아-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번째 뜻이 있습니다. 다른 구약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언급했는지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아, … 내가 너를 영원히 나의 아내로 만들것이다.나는 너에게 충실하고, 너를 내것으로 삼겠다. 그러면 너는 결국 내가 주님임을 알것이다. (호세아 2:17-20)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아내라고 불린다- 여자. 그뒤, 성경의 마지막 책은 이 여성이 적과 함께해야할 갈등을 묘사합니다.

나는 머리에 12개의 별로 만들어진 왕관을 쓴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임신중이였고, 그녀는 노동과 출산의 고통때문에 울었다.

그때..그녀가 아기를 출산할때 빨간용이 그녀의 앞에 있는거를 보았다. 그 용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삼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모든 나라를 통치할 아들을 낳았습니다….

악마라고 불리는 고대의 뱀, 전 세계를 속이는 사탄이 그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땅에 던져졌습니다.

용은 그가 땅에 던져졌음을 깨달았을때, 남자 아이를 출산한 여자를 쫓아 갔습니다.  그리고 용은 그 여자에게 화가났고, 그녀의 다른 아이들과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7, 90 AD)

예수님이 유대인이였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자손임인 동시에 , 여자의 자손이였고, 또 이스라엘 여자의 자손이였다. 약속은 양쪽 길 모두로 실현되었습니다 . 고대 뱀은 이스라엘의 ‘여자’와 적대적이게 되었으며, 그녀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이것은 오래된 역사 동안 겪어왔던 독특한 어려움을 설명하며, 태초에 예측되었던 것입니다.

뱀의 후손?

그러나 누가 사탄의 후손입니까? 성서의 마지막 권에서, 창세기의 약속 이후에 많은 페이지와 수천년 후에 올 사람들을 예언합니다. 설명에 유의하십시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며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짐승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몹시 놀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하다. 일곱 개의 머리는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일곱 산과 일곱 왕이다.  (요한계시록17:8-9)

이것은 여자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 사이의 싸움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에 창세기의 약속에서 처음으로 계시되며, 나중에 세부사항이 채워집니다. 오래전 가든에서 시작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최종 논쟁에 대한 카운트 다운. 이것은 당신을 역사가 정말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할수 있게 만듭니다.

타락된(2부) … 그리고 잃어버린 목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형상으로 타락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성경속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않아, 최초의 인간들 (아담과 이브)는 선택에 따라 시험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최초의 인간과 ‘뱀’의 대화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뱀은 항상 사탄이고-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적입니다. 성경에서, 사탄은 대개 누군가를 통해 말을 합니다. 이경우, 사탄은 뱀을 통하여 말을 하였습니다.

인류의 타락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 중에서 뱀이 가장 교활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하고 묻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동산의 과일을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은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뱀이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였다.

여자가 그 나무의 과일을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가 그 과일을 따서 먹고 자기 남편에게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3:1-6)

그들의 선택 (그리고 유혹)은 그들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것을 신뢰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같이’되고 , 자신을 신뢰하고 그들 스스로의 신이 되는것을 선택했습니다.

독립하려는 그들의 선택에 의해 그들은 바뀌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대면했을때, 그는 이브 (그리고 그녀를 만드신 하나님)를 비난하였습니다. 이브는 뱀을 비난하였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독립적인 본질을 계승 받았기 때문에, 그날에 시작된것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아담의 나쁜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비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유일하게 비난받은 사람은 아담이지만, 우리는 아담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담의 독립적인 본질을 계승받았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신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의 환경속에서 신이 되고싶어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을 잠그고, 경찰이 필요하며, 컴퓨터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훔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결국은 붕괴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퇴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부와 경제 체계의 모든 형태가 다른 어떤것보다 효과적일 지라도 결국 모든것이 붕괴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는 방법에 관한것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을 놓치게 만듭니다.

‘놓치다’라는 단어는 우리의 상황을 요약합니다. 성경 구절은 이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제공합니다. 구절은 말합니다:

16 이 모든 군인들 중에서 특별히 뽑힌 700명은 모두 왼손잡이인데 그들은 돌을 던져 머리카락도 맞힐 수 있는 명수들이었다. (사사기20:16)

이것은 고무총을 항상 명중시키는 전문가 군인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놓치다’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יַחֲטִֽא  입니다.  또한 이것은 구약을 통해 죄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은 돌을 가져와서 목표물에 맞춥니다. 만약 그가 맞추지 못한다면, 그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죄’는 우리를 위한 목적이나 목표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 집에는 나만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주인은 나에게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지만 당신만은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감히 이런 악한 짓을 하여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9:9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진은 행복하지도, 낙관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강하게 반응합니다. 한 대학생이 전에 나에게 “나는 이것이 이렇게 말하는게 싫어서  믿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과 관련된 무언가를 “좋아하는”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세금,전쟁, 또는 지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진실이 아닌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중 어떠한 하나도 무시할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서로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 경찰, 자물쇠들, 그리고 보안 시스템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죄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은 열린 마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20 그러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은 여러분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출애굽기 20:20

우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만들어 졌던 이미지에서 부패하였고, 그리고 이제 도덕적인 행동에 관해서는 목표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트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은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소식을 알릴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와의 대화에서 처음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처음 좋은 소식 발표를 다음에 알아보겠습니다. first Good News announcement

하지만 타락해버린….중간계의 오크처럼

이전에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왜 인간의 삶이 소중한지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각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에서 계속 됩니다. 이 문제는 성경의 시편 (노래)에서 볼수 있습니다.  (시편14:2-3)

이것은 우리 “모두”가 “부패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어 졌지만, 무언가가 우리 모두에게 이 형상을 망쳤습니다. 부패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독립( ‘모두는 ‘신을 찾는것’ 에서 떠나갔다 )과 선행을 하지 않음에서 나타난다.

생각하는 요정과 오크  

   오크들은 여러면에서 추악했지만, 그들은 다만 부패한 요정들이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오크와 요정들을 비교해보세요. 오크들은 추악하고 악합니다.  요정들은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레고라스를 보세요).  그러나 사우론이 과거에 부패하기 이전에, 오크들은 한때 요정들이였습니다. 오크 안에 있는 원래 요정의 이미지는 망가졌습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경은 사람들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은 요정을 만드셨지만, 우리는 오크가 되었습니다.

레골라스와 같은 요정들은 고상하고 위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옳고’ ‘그른’행동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아는것에 의해 확실하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컴퓨터의 올바른 작동을 손상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코드는 거기있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그것을 감염 시켰습니다. 성경은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로 시작하지만, 부패한 사람 또한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하는것과 딱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질문도 제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고 있지만 아직 부패해 있습니다.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불평하는대로:

“…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신다면 [예., 부패한 사람], 하나님은 다른 종을 발명하기 위해 더 많 주의를 기울이셔야 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2007.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  Christopher Hitchens.  2007.  God is not great: 종교가 모든 것을 망쳐 놓는 방법.  p. 100

하지만 그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진 후 끔찍한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최초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의 반란을 통해서 그들은 변화하고 부패하였다.

인류의 타락

이것은 종종 타락이라고 불립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성실한 결혼 계약처럼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동의한것이 있었고, 아담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된 나무’에서 나온 것을 먹지 않기로 동의했지만, 아담은 그것을 먹었습니다. 합의와 나무 그 자체는 아담에게 하나님께 충실하게 남을수 있을지, 아닌지 자유로운 선택을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본인의 창조에 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앉기가 불가능 하면 일어서는것을 선택하는것이 불가능 한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우정과 신뢰가 선택이어야 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 나무에서 나온 무엇도 먹지 말라는 명령에 집중했다. 그리고 아담은 복종하지 않는것을 선택했습니다.  아담의 불복종으로 시작된 일은 멈추지 않고 모든 세대를 거치면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속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에 알아봅시다.

예수님의 희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기 위해 오셨다. 이 메시지는, 인류 역사의 시초인 아브라함의 희생제유월절 희생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내 보이셨으며 더 깊고 자세한 내용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어 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은 이리도 많은 관심을 얻을 만큼 중요 한가? 고려해 볼 만한 질문이다. 성경에는 법으로써 분명히 밝힌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로마서 6 23)

“사망”은 말 그대로 “분리”를 뜻한다. 우리의 혼이 우리몸을 떠날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는다.이처럼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거룩(죄 없으심)하시나 우리는 본래 창조된 모습으로 부터 완전히 타락되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죄를 짓게 되었다.

Sin separates us from God
우리는 두 절벽 사이에 있는 골(틈)처럼 우리의 죄들로 인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

삽화에서 보듯이,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반대편의 절벽에 서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사이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가 있다. 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나무는 부러져 죽었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 스스로를 끊어놓아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분리로 죄의식과 두려움이 생겼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할 다리를 세우려고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인간은 여러가지를 하는데 예를 들면, 교회(또는 여타 성전) 다니기, 종교적으로 살기, 선한 일을 하고 남을 돕기, 명상, 더 많은 구제 활동, 더 많은 기도, 종교적인 행사와 예배등… 공덕을 쌓기 위해 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이들에겐 너무 목록도 많고 하기도 어렵다. 이에 대한 설명을 다음 그림에서 보자.

선을 위한 수고--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벌어진 사이를 연결할 수는 없다.
선을 위한 수고–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벌어진 사이를 연결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의 수고나  공덕, 희생, 고행 등은 그 자체가 나쁜것은 아니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기엔 충분치가 않다. 왜냐하면 죄로 인하여 우리는 이미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분리된 우리 자신을 노력(도덕적 종교적인 공덕)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하려 하지만 벌어진 거리를 결코 좁힐수가 없다.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노력들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하나님과의 분리)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사망선고를 받은 암환자가 치료를 위해 채식주의자가 되려는 것과 같다. 채식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암을 치료하는 근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암을 치료하기 위해선 완전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불쾌한 이야기들 뿐 이라서  듣기 조차도 싫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일들에 몰두함으로써 이 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암에 걸리고 진단을 받은 후에야 암에 대한 치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 듯이,  이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의 관심(하나님께로 나아가는)을 일깨우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해결책 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러나…(로마서 6장 23절)

짧은 단어 “그러나” 는 이 말씀의 방향이 역으로, 복음(기쁜소식)으로 전환됨을 알린다-즉, 암을 “치료함” 같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 23절)

이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신 희생이, 분리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충분히 연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이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또한 부활하신 모습 그 대로  장차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로써 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선 아브라함의 희생제와  최초 유월절 희생제에 적극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양쪽에 속하실 수 있으며, 분리된  틈에  걸치셔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 다리이시다. 아래 그림을 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벌어진 틈(죄)을 연결하는 다리 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벌어진 틈(죄)을 연결하는 다리 이시다

예수님의 이 희생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은혜(선물)” 로 말미암음이다. “은혜(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어떠한 은혜(선물)이건 그것은 결코 당신이 일한 대가로 주어지거나 받을 만한 가치있는 일을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일의 대가로 받는 다면 그것은 더이상 은혜(선물)가 아니다! 이처럼, 당신은 예수님의 희생을 살만한 대가를 치를 수도 없고 스스로 이룬 공적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선물(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다.  간단하다.

그러면 그 (은혜)선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것이 이젠 취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하심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건너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생명다리 이다. 이 은혜의 선물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 이심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세지 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다리를 “어떻게  해야 건널 수 있을까?” 선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라. 만일 어떤 이로 부터, 당신이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대가 없이 선물을 주려 할때, 그 선물이 주는 이득을 받고 싶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선물을 “취하는 것(선택)” 이다.  선물을 제안 받았을 때 오직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하고 거절 하던가 , “은혜에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은혜의 선물은 우리가 선택하길 바라시며 주어진 것이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러나 마음으로 동의해야 하거나연구해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예화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선물을 선택하여 다리를 “건넘”으로 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 모두가 꼭 선택하여 받아야 하는 은혜(선물)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 모두가 꼭 선택하여 받아야 하는 은혜(선물)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로마서 10장 12절)

이 약속의 말씀은 “모든 사람” 에게 해당됨을 알라. 예수님은 죽음에서 일어나(부활)하시어 현재에도 살아계시며  “주님” 이시다. 따라서 당신이 예수님을 부르면 주님은 들으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부르고 그 분과 대화 함으로써 구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어떻게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며 주님과 대화 하는가를 보기로 적었다. 기도는 마술을 부리는 주문도 아니고 힘을 주는 특별한 단어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갖었던 것과 같은 믿음, 즉 예수님의 능력과 뜻 안에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믿으면 주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 복음은 강력하며 동시에 아주 간단한 것이다.  이제 아래 보기의 기도를 큰 소리로 하던 조용히 마음으로 하던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으리라는 마음으로 따라하기  바란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제 안의 죄로 인하여, 제가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나 희생으로도 이것을 되돌릴 수는 없음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희생이셨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셨으며 이것으로 예수님의 희생은 능력이 되심을 믿습니다. 부디 원하옵건데, 저를 죄로 부터 씻어주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사 영생을 얻게 하옵소서.  죄에 묶인 이런 삶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저를 자유롭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저를 위해 희생하시고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평생토록 저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을 저의 주님으로 따르겠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심

인간의 기원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차근 차근 알아 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에 성경을 사용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가 생각해 보자. 한 개의 유전자 코드가 인간이 만든 최고의 컴퓨터 코드 만큼 뛰어나다. 우리는 현대의 최신 나노기술보다 작은 크기의 단백질로 부터 만들어진 기계로 볼 수도 있는데 자동으로 세포의 손상을 복구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고, 개성과 의식을 갖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 – 최고 디자이너 – 에 의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우선 성경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하나님이 팔이 둘이고 머리가 하나인 물질적인 존재란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 보다는 사람의 기본적인 성질이 하나님의 유사한 성질을 이어받았다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씌어 있는) 하나님과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으로 지적 능력, 감정, 의지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때때로 슬프거나, 마음 아파하거나, 화내거나, 기뻐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영역의 감정들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성경의 하나님도 이와 비슷하게 어떤 것을 선택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지적 능력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이런 면들을 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우리는 “나”와 “당신”으로 우리 스스로를 분별해서 인지할 수 있다. 우리는 비인격체인 “그것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스타워즈 영화시리즈에 나오는 ‘힘’과 같은 비인격체로 그려질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인격체이다.

우리는 미적감각이 있는가

우리는 또한 예술이나 드라마를 높이 평가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고, 또한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보라. 이것은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이나 문학에 대해서도 그렇다. 음악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하고 – 여기에다 춤추는 것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생각해보라. 음악은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만든다. 우리는 소설, 연극, 영화들에 들어있는 좋은 스토리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예술가이고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우리 자신에게 즐거움과 활력, 생동감을 주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 우리가 미술, 드라마, 음악, 춤, 문학 등에 내재적으로 미적 감각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만 하지 않은가? 솔직한 무신론자이자 인지 과정에 대한 이해에 권위가 있는 대니얼 대닛으로 부터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러한 연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음악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좀 처럼 이렇게 질문하진 않는다. 왜 음악이 존재할까? 라고. 간단한 대답이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맞는 말이다: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그것을 많이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가? 이유는, 음악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음악이 아름다운가? 이것은 정말 멋진 생물학적인 질문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좋은 해답은 없다.” (대니얼 대닛. Breaking the Spell: 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  p. 43)

인간으로서의 우리에 대한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물질적인 과정이란 것에만 기반해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면 왜 예술이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 유물진화론의 관점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볼 수 있는 대닛이, 그냥 모르겠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면 신이 예술가이고 미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을 만드셨고 아름다움을 즐기신다.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서 시작하면 무신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설명이 된다.

우리는   윤리적인가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짐’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윤리적인 자질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모두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는 다를지라도 무엇이 ‘나쁜’ 행위인지, 무엇이 ‘좋은’ 행위인지를 이해한다.  윤리적인 자질은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차드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윤리적인 판단을 조종하는 것은 우주적인 윤리 문법이다 … 언어에서 처럼, 우리의 윤리문법을 만드는 원리가 우리의 인지능력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 The God Delusion. p. 223)

도킨스는 선과 악을 우리가 아는 것이 언어에 대한 능력 처럼 우리 안에 새겨져 있다고 설명한다. 도킨스는 우리의 윤리 능력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간단한 설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윤리적이고 우리가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윤리적인 자질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새겨져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유명한 무신론자인 샘 해리스의 반대 의견을 들어보자.

“만약 신앙이 윤리의 유일하고 실재적인 기반이라고 믿는 것이 옳다면, 무신론자는 유신론자들 보다 좀 덜 윤리적이라야 한다.” (샘 해리스. 2005. Letter to a Christian Nation p.38-39)

해리스는 잘못 이해하고 있고 전적으로 틀렸다.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우리의 윤리적인 감각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에서 오는 것이지 신앙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도 윤리적인 감각이 있고,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무신론은 왜 우리가 – 우리 모두의 내부에 –윤리 감각이 있는지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모두 관계를 중하게 생각하는가

따라서 성경적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관측이나 기억을 통해 알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알 수도 있고, 반대로 인간에 대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사람들이 관계를 얼마나 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근데 친구와 같이 보면 더 훨씬 더 좋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의미있는 친구관계와 가족 관계는 우리의 웰빙에 대한 느낌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역으로, 외로움이나 깨어진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는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도 이처럼 관계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러하다. 성경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1 John 4:8). 성경의 많은 부분들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사실상 성경 안에서 예수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이와 관련해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둘 다 필요한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체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그냥 ‘세상을 움직이는 힘’, ‘ 최초 원인’, ‘전지적인 신’ 혹은 ‘은혜를 베푸는 존재’ 등으로만 생각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생각 속에서 우리가 지어낸 신이 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이런 모든 요소들을 다 포괄하시지만 ‘관계’에 그야말로 열정적이신 분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을 갖고’ 계시다기 보다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성경이 다룰 때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모습은 아버지와 자녀로서 표현되거나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표현된다. 감정이 배제된 철학적인 비유는 아니지만 가장 깊고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이제 기초가 마련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정신, 감정,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감각이 있고 스스로를 인지한다. 우리는 ‘좋은 것’ ‘공정한 것’에 내적으로 이끌리는 ‘윤리 문법’을 갖는 윤리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 드라마, 예술 그리고 스토리를 개발하고 평가하는 본능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재적으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친구를 만들어간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이러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유추된 결론은 이제까지 앞에서 우리가 관찰한 것들과 적어도 일치한다. 다음에 올릴 글에서는 왜 우리들의 관계가 항상 실망스러운지 왜 하나님과 거리가 느껴지는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보기로 하겠다. 왜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램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